수련하는 돌 원장 소개


요가원소개


서울대 미술대학 대학원 

동국대학교 인도철학과 대학원 박사


▒연구 논문 : <시지각의 중심성에 의한 숭고미의 표현연구>

               <수행차제(修行次第)로서 아사나(좌법)의 의의>

               <요가는 삼매에 이르는 수행의 과학이다>

               <결가부좌의 전개와 수행론적 의의>(박사학위 논문) 

▒저서 : [삼매의 생리학](상하)

         [붓다는 결가부좌를 하지 않았다]   


수돌 소개 : 명상․수행생리학 전문가. 

서울대 대학원에서 <시지각의 중심성에 의한 숭고미의 표현연구>로 석사를 마쳤다. 이 논문을 통해 생리적인 시각구조가 정신적인 숭고함으로 드러나는 기제를 연구하였다. 

20대부터 불교에 심취하여 간화선 수행을 접하고, 

30대에 요가에 입문하여 쿤달리니 각성을 이루고 명상의 수행생리학을 연구하고 있다. 

40대에 수행을 심신의 생리적 현상에 근거해서 바르게 알기 위해 산스끄리뜨와 빨리어를 독학하여 쿤달리니 요가의 근본 문헌인 <하타요가쁘라디삐까>, <게란다상히따>, <쉬바상히따>를 번역하였으며, 붓다의 진설(眞說)에 다가가고자 니까야를 원문대로 읽으며 공부하였다. 

원전연구에 매진하다 동국대학교 인도철학과 박사과정에 들어가 2018년 <결가부좌의 전개와 수행론적 의의>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 논문은 결가부좌의 기원과 수행생리학에 대한 고고학적, 문헌적, 수행생리학적 연구로서, 붓다 당시의 좌법과 원리에 대한 국내외 최초의 연구라고 할 수 있다. 

저서 <삼매의 생리학>(상/하, 2018)과 <붓다는 결가부좌를 하지 않았다>(2019), 논문으로는 <수행차제로서 아사나(좌법)의 의의>, <요가는 삼매에 이르는 수행의 과학이다>, <인도 신화에 나타난 Haṭhayoga 수행생리학>, <붓다는 결가부좌를 취하였는가> 등이 있다. 이들 저서와 논문은 호흡 수행을 통해 나디(경맥), 짜끄라, 12경맥과 기경팔맥 등을 관조하고, 이것이 근본적으로 무의식과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통찰한 결과를 글로 드러낸 것이다. 

현재는 선정 체험을 생리적으로 이해한 바를 경전을 통해서 확인하고 수행하고 있으며, 잊혀져가는 불교와 요가의 수행생리학을 알리는 것을 업으로 받아들이고 정진하며 틈틈이 가르치고 있다. 

*연락처 : 010-8216-2010,  imiioi@hanmail.net


수돌의 요가 수련기▒


15살 즈음에, 돌맹이를 무심코 발로 차고 또 차고 가다가, 발끝에 돌맹이가 닿는 순간 주변의 모든 것이 발 끝에 연결되는 체험을 하고 존재계가 무한한 연속성 속에 있음을 아련하게 보았습니다. 21살 즈음에는. 모든 나의 행위가 어떤 의미에서 이루어지는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 '이 뭐꼬?'라는 화두를 자연스럽게 들게 하였는데, 며칠 동안 여기에 집중하던 중 척주를 따라 진동하는 전율이 머리로 솟아오르는 체험이 있었습니다. 

  20대 중반에 결혼하고 10여년 동안 이러한 체험은 가장이라는 짐 속에 묻혀 버렸었습니다. 


  요가에 처음 입문했던 시절은 30대 중반이었습니다. 다른 기억들은 아련하지만, 요가 수련 초기의 몇가지 경험들은 지금도 그 순간을 떠올리면, 생동하는 에너지로 진동합니다.

  뱃속까지 섬뜩하게 시려오는 차가운 손발로 수련실 바닥을 딛고서 거친 호흡으로 따라하던 아사나, 수백 번을 반복하던 호흡, 처음에는 어지럽고 매슥거리기도 하였지만, 누구나 한다는 생각으로 참고 반복하였습니다.

  손끝부터 팽창하는 느낌에 손을 바라보았지만 손은 여전히 그 모양 그대로였고 부풀어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온몸에 가득 채워지는 어떤 팽창감으로 당황스러움도 있었으나, 정신은 여전히 그 상황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더욱 신기한 것은 수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길에 발바닥이 닿는 느낌이 없어서 발을 내려 봤는데, 발은 분명히 땅에 닿아서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공중에 떠있는 듯 가벼운 몸과, 파란 하늘이 머리에 닿는 듯한 청명한 느낌은 그 후로도 반복해서 일어났습니다.

  이후, 그림을 가르치는 업을 하는 이유로 규칙적으로 정해진 수련 시간에 요가원에서 수련할 수 있는 날이 많지 않았습니다.

  도시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이 일상에 쫓기어 대부분 그렇듯이, 매일매일 수련원에서 정해진 시간에 요가수련을 하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거의 매일 틈틈이 몇 가지 아사나와 결가부좌를 하고 호흡 수련은 꾸준히 하였습니다.

  초기에는 고관절이 굳어 있어서 좌법이 아예 되지 않았습니다. 양손으로 발끝을 붙잡고 버티다시피 하여야 겨우 몇 분을 유지하였습니다. 이때 호흡 수련은 마시고 내쉬기를 수백 번 반복하고 나서 숨을 마시고 참는 것이었지만, 그 효과는 굉장한 것이었습니다.

  때로는 숨을 멈추고 죽을 때까지 참으면 어떻게 될까 하는 생각으로 가슴이 터질 정도로 숨을 참기도 반복했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한편으로 무모해 보이기도, 긴장된 모습이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극단적으로 숨을 멈추더라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받아들이면, 오히려 극도의 평화로움이 있었으며, 호흡이 자연히 멈춰져서 이대로 영원히 유지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생리학적 이해를 한 후로는 그러한 수련을 지도하지는 않습니다. 

 

  수련이 반복되면서 쁘라나(기氣)라는 것이 이러한 것이구나 하고 느끼게 되면서 기감(氣感)이 확연해졌습니다. 이때는 인간의 몸뿐만 아니라 모든 자연계가 어떤 유기적인 에너지 장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일어납니다. 15살 때의 체험이 다시 떠오르게 되었으며, 주변 세계에 대한 인식도 점차 바뀌어 갔습니다. 

   ‘나’라는 존재는 쁘라나와 함께 끊임없이 흐르고 있고 변화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에 대한 인식이 바뀌면서, 나’라고 하는 것이 물질적인 근육 덩어리와 뼈와 피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움직이게 하는 이 쁘라나의 변화와 관련되어 있음을 관(觀)할 수 있었습니다.

  호흡은 氣(prāṇa, vāyu)를 움직이므로, 당연히 호흡을 통해서 마음과 기는 물과 물결처럼 연결되어 있습니다. 쁘라나의 움직임이 마음의 변화와 함께 하는 것임을 관(觀)하게 되면 자연히 부정적인 감정이나 행위를 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그결과  나’라는 고정된 관념이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때부터 미세한 내면의 움직임에 합치하는 좀 더 정교한 수련에 대한 열망이 싹텄던 것 갔습니다. 이러한 열망은 주변에 요가하는 분들이나 단전호흡 등 여타 다른 수련들에서 발견되는 부작용에 대한 사례들을 직접 체험하면서 더욱 강해졌습니다.

  우리 주변에 수행자들과 수많은 수련법들이 각기 장단점도 있으며, 나름 독자성을 강조하기도 하지만, 수련 중 나타나는 상기증에 대한 확실한 대처법이나 수련 초기부터 상기증을 해소하는 수련체계를 만나기 어렵습니다.

  요가의 발생지 인도는 어떨까요?

  인도를 다녀오는 많은 요가수련자들을 봤습니다. 제가 기대하는 그런 수련체계를 접하고 오는 분들은 없었습니다. 대부분이 체조선수하기 위해 인도를 다녀오는 게 아닌가 할 정도로 잡다한 아사나에만 열중해 있었습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인도의 요가아쉬람들에서 출판한 다양한 문헌들을 먼저 살펴보았습니다. 대부분 『요가수뜨라』나『 우빠니샤드』에 잘 정리된 수련 단계를 무시하고 있었으며, 생리학적 근거가 부족한 행법을 만들거나, 특정 행법만을 강조하다보니 수련의 형식에 치우치게 되어 그 원리는 무시하는 일이 비일비재하였습니다. 이들 문헌들에서 아사나는 쁘라나를 수련하는 호흡수련으로 이어지는 예비 과정이 아니라, 쁘라나(氣)와는 분리된 서양 해부학적 개념들로 대체되어 있었습니다. 또는 아사나와 호흡수련, 무드라 등을 결합하거나, 짜끄라 명상을 아사나와 병행하는 등 수련 과정을 무시하고 있었습니다.

 

  정통 요가 문헌에서는 반드시 수련 체계를 명시하고 있으며, 하타요가는 쁘라나와 나디, 짜끄라의 원리에 대한 이해에 기반하여 수련하는 것임을 누구도 부정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무엇보다 하타요가는 아사나 단계에서부터 위로 솟아오르는 열의 제어를 강조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사나 단계에서부터 이 원리들에 근거해서 수련하는 곳은 발견하기 어렵습니다.

  대부분의 아쉬람은 요가라는 이름으로 현대인들에게 보편적인 건강법으로서 알려진 스트레칭이 건강에 좋다고 해서 그것을 요가의 아사나와 동일시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었습니다.

  대중성이나 인지도에 비해서, 그런 거대 아쉬람에서 출판된 문헌들 중 어디에도 이다와 삥갈라, 수슘나 나디(경맥)에 대한 정확한 노선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 있었으며, 아예 초월적인 신비화로 일관하기도 하였습니다.

  어쩔 수 없이 산스끄리뜨 문헌을 직접 공부해야 했습니다. 산스끄리뜨는 가장 정교한 언어로서 고대 인도의 요가 문헌들이 이 언어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요가의 원래 모습을 알고자 하면 반드시 학습해야 하는 언어입니다.

  많은 요가 문헌 중 최고의 문헌으로 알려진 『하타요가쁘라디삐까』를 먼저 연구하여 거기에 기록된 그대로 수련하기로 맘먹고, 직장도 그만두고 공부와 수련에만 전념하기도 하였습니다.  작심하고 시작한 공부 덕에 요가 수련원은 자주 이사해야 했고, 적자를 면치 못하였습니다만, 아내의 인내와 후원해 주시는 분들의 도움으로 이렇게 아직도 포기하지 않고, 원전에 근거해서 하타요가의 정통적인 수련을 전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타요가쁘라디삐까』에서 말하는 하타요가의 핵심은 열의 제어에 있었습니다. 이 문헌은 인체의 열을 제어하는 원리를 상세하게 밝혀 체계적으로 정리한 하타요가 최고의 수련서입니다. 

  열을 제어하는 『하타요가쁘라디삐까』의 탁월한 수련 중 하나인 심장에 이르도록 마시는 호흡수련은 아나하따짜끄라(anāhata­cakra)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초기에 가슴 가운데에서 마치 살이 찢어지는 듯한 통증이 있었으나 점차 그 영역이 확장되면서 통증이 시원함으로 전환되면서 좁았던 가슴이 전신으로 연결되었습니다. 이때 비로서 가슴이 뜨겁다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직접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가슴 가운데가 앞뒤로 구멍난 거처럼 비워지면서 어떤 감정적 흐름에도 속박되지 않는 상태가 있구나하는 확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상기증으로 차갑던 손발이 항상 따뜻해졌습니다. 그리고 어려서는 자연스러웠으나 나이들면서 잊어버렸던 감동과 전율, 가슴 깊은 울림이 되살아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저는 제 자신이 눈물이 원래 없는 사람인줄 알았는데, 눈물은 눈이 아니라 가슴 속에서 나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가슴 가운데에 이르도록 호흡하는 수련은 이미 단전호흡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이상하게 보일 수 있으나, 정작 그러한 수련법들이 놓치고 있는 단점을 보완하는 완벽한 생리학적 원리를 간직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체험은 요가에 대한 확신으로 이어졌습니다. 『하타요가쁘라디삐까』와 『게란다상히따』, 『쉬바상히따』와 『요가우빠니샤드』 등을 참조하면서 아사나에서부터 명상까지 수련과 더불어 생리학적으로 밝혀나갔습니다.

  무엇보다 쁘라나(氣)와 나디(경맥)의 원리에 근거한 수련 체계인 만큼 동양의학의 氣와 경맥(經脈)의 원리와도 부합하여야 한다는 생각으로 최고의 한의학 문헌인 『황제내경』과 『기경팔맥고』,『침구갑을경』, 『의종금감』 등에 논해진 경맥을 검토하고 요가와 비교하여 보았습니다.

  다행히 수련 과정 중에 체내의 모든 경맥이 열리게 되어, 침(鍼)을 꽂아가면서 모든 경맥 노선을 검토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침구학을 별도로 배운 바는 없지만 하타요가 수련 과정에서 자연히 그 원리를 터득할 수 있었습니다.

 

  한의학 문헌들의 경맥검토하고 그러한 경맥의 원리가 하타요가 수련과 다르지 않음을 확인하였습니다. 12경맥과 기경팔맥을 확인하기 위해서 혈자리에 침을 놓고 길게는 7시간 동안 경맥의 흐름을 관찰하곤 하였습니다. 경맥 체험은 기존의 경맥도의 오류를 발견하는 계기가 되었는데, 좌우 교차하는 음경맥과 그렇지 않은 양경맥의 차이를 발견하였으며, 특히 대부분의 경맥이 두 노선으로 흐른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현행 경맥도는 중간 중간에 지그재그로 꺾이는 흐름을 보여주고 있는데, 두 개의 노선을 하나로 표현하다보니 그렇게 구불구불해진 것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좌우 음양, 이다/삥갈라와 같은 좌우 생명에너지에 대한 직접적인 통찰이 가능해져서, 이러한 수련과 공부는 티벳불교의 무상요가딴뜨라(촤상승요가)와 도교(선도仙道)의 신비생리학적 수련체계에 대한 이해로 이어졌습니다. 덕분에 이전에는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던 『혜명경』,『천선정리』, 『성명규지』 등 선도(仙道) 문헌들 또한 다소 쉽게 읽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요가 원전에 기록된 수련과 한의학의 경맥 원리, 선도수련 등에 대한 이해는 대중화된 요가수련들이 어떤 점에서 잘못되었는지 극명하게 판단할 수 있는 객관적인 근거가 되었습니다. 특히 꾼달리니에 대한 지나친 영적 신비화와 동경, 잘못된 관념에서 비롯된 결과 없는 열정 등으로부터 비롯되는 부작용을 충분히 해소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하타요가를 수련하는 사람은 누구나 꾼달리니에 대한 동경이 있습니다. 영적 수행이라는 다양한 수행에 전념하는 수행자들도 또한 꾼달리니에 대한 신비주의적 관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영적 체험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미스테리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간절하고 온전한 집중은 존재 전체로 몰입하게 합니다. 어떤 목적도 없는 행위 그 자체에 몰입하는 때에 꾼달리니는 깨어납니다. 누구에게나 이런 체험은 일어날 수 있습니다. 다만 그것을 바르게 삶 속에서 실천하고 부작용에 시달리지 않고 그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확고한 생리학적 원리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기억을 하건 하지 못하 건 그런 순수한 열정적 몰입의 순간이 있을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하타요가 문헌에 설해졌듯이 누구에게나 꾼달리니 각성은 가능합니다. 

 

  꾼달리니는 전체성에 대한 자각으로서, 체내 모든 열기의 응집체였습니다. 하타요가 문헌들은 뜨거운 열이 몸의 중심으로 몰입하면 체내 생명 에너지는 그 열기를 따라서 강렬하게 융합하고 물라다라짜끄라 위에서 꾼달리니를 형성할 수 있는 수련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강렬한 호흡이나 열정 만으로는 이 에너지를 제어할 수 없음을 수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터득할 수 있었습니다. 육체 안에 진동하는 미세한 몸의 전체성에 대한 자각이 꾼달리니 수련 과정에서 병행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다와 삥갈라 나디를 제어할 수 있는 수련자에 의해서만 수슘나 나디 수련이 가능합니다. 또한 꾼달리니가 각성되면 그것이 자연적으로 몸과 마음을 재구성하게 되는데, 이때 아나하따(마음)가 완전히 열려서 심리적으로 모든 가능성의 세계를 인정하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어야 부작용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즉 하타요가 수련을 완성하는 토대는 꾼달리니와 아나하따의 열림이었습니다.

  꾼달리니에 의해서 정신적인 차원의 대전환이 가능한 반면, 나디를 제어하는 원리를 모르는 수행자는 자신을 상하게 됩니다. 무엇보다 좌법으로서 아사나의 원리를 통달하지 못하면 강렬한 꾼다리니를 제어할 수 없습니다. 나디 즉 경락이라고 할 수 있는 기의 흐름 노선을 하나하나 확인하면서 자연스럽게 동양의학의 원리를 터득하게 되었습니다. 나디(경락)체계에 대한 연구와 체험은 고대 요가수행자들이 어떻게 요가 수행을 하였을지를 가늠할 수 있는 토대가 되었습니다. 인체는 새장과 같다는 우빠니샤드의 가르침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새장과 그 속에 같혀있는 새와 새알은 인간의 실존을 드러내는 고대 현자들의 매우 적절한 비유였습니다. 자유롭게 허공으로 날아오르는 꾼달리니는 알속에서 깨어나서 새장을 벗어난(moksa) 아뜨만이었습니다.

 

 수슘나 나디 수련 단계 이르면 명상을 배우지 않아도 자연히 라자요가의 경지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 단계는 새로운 인식체계를 가져오기 때문에 초월적 인식으로 여겨집니다. 정신의 새로운 대전환점을 만듭니다. 수슘나는 가슴에서 머리에 이르는 길이기도 하며 물라다라에서 척주를 따라 머리에 이르는 길이기도 합니다. 단전과 임독맥만을 강조하는 방식으로는 수슘나를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가슴의 무한한 확장에 기초한 꾼달리니 수련의 경험은 존재 자체에 대한 변화와 새로운 자각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에, 더욱 명확한 존재의 현상을 확인시켜주었습니다.  

 

  지난 10여년 간 요가 수련은 많은 심신의 변화와 체험이 이어졌지만, 무엇보다 진리가 무엇인지, 왜 고통스러운지, 왜 욕망하는지, 왜 알려고 하는지 등 간절한 질문들로 혼란스럽던 20대 때의 갈증을 많은 부분 해소할 수 있었습니다.


  이상은 수행과정 중 생리학적인 부분들에 대한 내용들만을 위주로 기록한 것입니다. 


  그간의 인연들에 대해서 감사드립니다.

 

  나마스떼!

2013년 2월 18일, 봄을 부르는 雨水에,  이영일 삼가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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