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5-11-01 18:24
바른 인식과 요가 수행
 글쓴이 : 최고관리자
조회 : 873  

빨리어로 Ariyo aṭṭhaṅgiko maggo,범어로는 Ārya 'ṣṭāṅga mārgaḥ라고 하는 익히 알려진 '팔정도'는 '팔성도八聖道'라고 번역하는 것이 원어의 의미와 가깝습니다. 이 8가지 지분은 정견正見、정사유正思惟、정어正語、정업正業、정명正命、정정진正精進、정념正念、정정正定입니다.

그런데 왜 見、思惟、語、業、命、精進、念、定 각각에 '正'(Sammā)을 결합하여 8정도를 설하였을까하는 의문이 자연스럽게 떠오릅니다. 이는 간결하게 말하면, '바르지(right) 않은' 見、思惟、語、業、命、精進、念、定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1. 바른 견해 또는 이해(Sammā-diṭṭhi;正見)

    2. 바른 생각 또는 의도(Sammā-saṅkappa;正思惟)

    3. 바른 말(Sammā-vācā;正語)

    4. 바른 행위(Sammā-kammanta;正業)

    5. 바른 생계수단 또는 직업(Sammā-ājiva;正命)

    6. 바른 노력(Sammā-vāyama;正精進)

    7. 바르게 마음 일깨우기 또는 알아차림(Sammā-sati;正念)

    8. 바른 정신집중 또는 삼매(Sammā-samādhi;正定)

이 중 첫 번째인 정견은 말 그대로 '바른 견해'로 알려져 있으며, 영어로는 ‘Right understanding and view’라고 번역됩니다. 정견은 니까야(남전 대장경)에 Sammādiṭṭhi Sutta(정견경正見經, MN 9 또는 M.1.1.9 또는 M i 46)라는 문헌이 별도로 존재할 정도로 중요합니다. (이 문헌에 대한 영어번역은 http://www.accesstoinsight.org/tipitaka/mn/mn.009.ntbb.html를 참조할 것)

“바른 이해란 무엇인가 ? 비구들이여, '괴로움'에 대해서 아는 것(고苦), '괴로움의 발생'에 대해서 아는 것(집集), '괴로움의 소멸'에 대해서 아는 것(멸滅),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대해서 아는 것(도道), 이것을 바른 이해라고 한다.”(장아함 22 『大念處經』DN II, 311-2)

‘괴로움에 대해서 아는 것’은 무엇일까요? '바르게 이해하고 본다는 것'은 과학자나, 의사, 법률가 등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의무이며, 일상적인 삶의 한 순간도 이것을 떠나서 있을 수 없기 때문에 굳이 불교에 국한된 것으로 치부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정견이나 정사유는 본다는 것 자체, 즉 '바른 인식'을 전제로 할 때 가능하지 않을까요? 어떤 견해든지 바른 인식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사견(邪見)이 될 것입니다.

정견은 씨앗과 같으며, 모든 말과 행위들은 그로부터 자라는 나무와 같습니다. 씨앗에 따라서 당연히 자라는 나무도 달라지겠죠. 사견(邪見)은 잘못된 나무를 키웁니다.

‘괴로움’을 바르게 이해하고 보기 위해서는 어떤 조건이 필요할까요? 요가수행자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특히 하타요가와같은 실천 수행에서 ‘바른 인식’과 같은 인식론에 대한 중요성이 너무 소홀하게 다루어진다는 지적이 있는데, 사실 실제 수행 과정에서는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단순히 행법만은 암기해서 반복하는 방식으로 수련하는 하타요가의 대중화가 만연해 있기 때문에, 이러한 지적은 하타요가에는 관법이나 명상이 부족하다는 지적으로 확장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지적은 하타요가를 잘못 이해한 결과이며, 무엇보다 실제 전통적인 요가를 경험해보지 못하였을 때 가지는  요가에 대한 편견(사견)에 불과합니다. 전통적인 요가 수행을 실천하는 수행자라면 하타요가에 바른 인식과 관법, 명상이 부족하다는 편견을 가질 수 없습니다.

하타요가는 『요가수뜨라』와 근본적으로 동일한 수행체계를 따르는데, 『요가수뜨라』 첫장의 서두에서부터 바른인식(prāmaṇa)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타요가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쁘라나(기)와 나디(경맥)의 생리학은 단순히 이론이 아니라, 수련 과정 중에 수행자가 '직접 지각'하여 내면화하는 것입니다. 바른 인식의 한 조건인 직접 지각을 실천하는 것이 곧 하타요가이며 요가 본래의 관법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요가 수행을 하면서 쁘라나와 나디에 대해서 체험하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서 근본적인 질문이 이루어지고 있지 못합니다. 쁘라나의 흐름(나디)에 대해서 모르고서 요가를 수련한다는 것은 근본적인 문제를 이미 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다와 삥갈라, 그리고 수슘나를 바르게 인식하지 못하고서 꾼달리니 수련을 한다는 것은 잠자는 독사를 깨우는 것처럼 위험합니다. 임맥과 독맥으로 요가의 나디를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바른 인식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수행자 스스로 내적인 마음작용과 함께 작동하는 쁘라나와 나디에 대한 철저한 '직접 지각'이 절대적으로 가능해야 합니다.

물론 행법만이 만연한 대중화된 요가도 대중에게 기여하는 바가 있음을 간과해서도 안될 것입니다. 그러나 전통적인 요가에서 나디에 대한 관찰로부터 바른 인식이 가능한 수련이 시작되며, 행법만 형식적으로 따라하는 요가는 바른 인식과 관법이 결여된 것입니다.

스스로를 요가지도자 내지 요가수행자라고 생각하신다면, 본래 요가의 모습을 훼손하고 있지는 않은지 자문할 때라고 사려되어 이글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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