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5-11-02 21:11
나는 나 이외의 것과 하나다.
 글쓴이 : 수돌
조회 : 631  
 
나는 나 아닌 것, 일체 없이 존재할 수 없다.
 
의식주는 물론 인간 관계 일체가 있음으로 해서 내가 있는 것이니!
관계 자체가 '나'라고 할 수 있다!

나라는 존재는 나 이외의 모든 것들과의 관계 속에서 드러난다.
내가 나라고 느끼는 일체의 정보는 나 이외 것들과의 관계라고 할 수 있으리!!

'나'는 없고 오로지 관계만 있을 뿐이다.

금강경에 따르면,

주체는 없고, 일체가 서로 기대서 존재한다. 

즉, 연기적으로 함께 존재하는 금강같은 가르침을 준다.


딱히 금강경이 아니라도 대부분의 종교가 전체성, 동시성, 자타 불이, 합일의식 등을 통해서

개아를 초월한 어떤 상태를 말해왔다.

또한 왠만한 현대과학적 결과물들도 이러한 전체성, 동시성에 대한 통찰을 보여주고 있으니!


이만하면 우리는 주변세계와 나를 구분짖지 않고 

당연히 행복한 삶을 살아야할 것 같은데,

실제 그렇게 쉬운 거 같지는 않다.

 

왠만한 철학서나 종교적 전통에서 이러한 가르침을 쉽게 접하면서도 

우리는 전체성을 체험하지 못하는 걸까?


보통 수행한다는 사람치고 여기저기 돌고돌아 

어느 한 가지에 평생을 안주하는 경우가 드문 걸 보면 

그게 그렇게 어려운 것인 듯도 하다.    


또는 어느 한 종파에 헌신하는 경우라 하더라도 

극도로 편협한 신념으로 무장된 경우가 허다하니 주변과 분쟁이 끊이지 않는 걸 보면,

전체성이니 동시성, 합일의식은 그저 말뿐인 듯도 하네.  

 

모든 종교가 사랑과 자비를 표방하는데, 

세상은 둘째치고 종교 간의 갈등은 여전히 끊이지 않았다.


'나는 나 이외의 일체와 함께 전체적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한다고 해서 

반드시 전체적인 삶을 가능하게 하는 건 아닌 거 같다.


생각으로 알고 있는 것만으로는 실제 삶이 그렇게 되는 것이 어렵다. 


그래도 실천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알아야 할 거 같은데!!!


나는 나 이외의 세계로부터 결코 분리될 수 없다는 믿음이나 앎이 

어떻게 해탈, 깨달음 등 통칭 종교적 신비체험으로 이어지는 걸까? 


어쨋거나, 모든 영적인 수행이 나와 분리된 세계와의 합일을 지향하는 것이라면,

나와 나 이외의 것들과의 분리가 곧 모든 종교적 수행의 동기일진데!


그런데,

이미 세상과 분리된 분별의식으로 되어버린 의식 상태에서

아무리 세상과 나는 하나라고 외친다 한들,

우리는 합일된 의식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합일, 즉 '다르지 않음(무분별 )의 상태라는 것이 있다'는 확신은 어떻게 하는 걸까?

그러한 합일 체험이 과거에 있지 않고서야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으리요!

합일체험은 생각이 아니기 때문에 

논리적인 사고로 추정되는 정도로는 충족될 수 없다.

전체성의 합일체험은 실제 체험을 통한 확증을 요구한다. 


그런데 왜 합일하고자 하고, 분별이 없는 동일성의 상태를 그리워 할까?

그리워 하면서도 왜 동일해지지는 못하는 걸까?


그러한 상태를 그리워한다는 것은 그러한 상태에 이르렀던 적이 있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현재의 불만족스런 상황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몸부림이 동일성의 합일상태로 이끄는 걸까? 


그런데 경험해본 적도 없고 알지도 못하며, 또한 현재 그러한 상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 신비체험을 어떻게 우리는 염원하는 걸까? 


참으로 역설적인 상황이다. 


어쩌면 우리에게 이미 불성이니 신성, 성령이니 하는 것이 갖추어져 있기 때문에, 

우리는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그냥 그러한 동일성의 상태, 합일의식을 향하게 되는 게 아닐런지!!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경험해본 적이 없는 것을 향하는 마음이 가능할까?


그렇다면, 이미 내 안에 있는데, 우리는 왜 못 알아보는 걸까? 



비유를 하자면, 

그림이 그려지기 전의 하얀 종이는 그림이 그려진 뒤에도 그림 뒤에 존재하면서,

그 위에 그려진 형상들을 받치고 있으니!

형상들이 가득 그려진 종이는 그 하얀 면을 드러내고 있지는 않으나, 

언제나 그 형상들이 존재할 수 있는 바탕이 되는 하얀 종이처럼

우리는 우리들 내면에 가득 채워진 생각들을 받치고 있는 본연의 바탕을 지니고 있는 거다.


형상들의 바탕인 종이는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마음의 바탕이라고 할 수 있으니!

그려진 형상이 다른 각각의 그림은 서로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의 마음과 같다.


마치 수 많은 그림들이 그려진 형상은 각각 다르더라도 그 바탕이 동일한 것처럼!

그러한 근원적인 본연의 바탕은 모두가 동일한 것이고

누구와도 통하는 것이겠네.



이상의 내용을 인정할 수 있다면,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고통은 곧 분별심이겠지.

나 이외의 것이라는 생각으로 나와 분리된 것들의 세계는 

그 자체가 모든 고통들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요가 생리학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우리 몸은 쉽게 인지 가능한 전체성의 가장 확실한 단위다!


발끝에서 머리까지 하나로 이어진 생명에너지의 흐름이 

정체되거나 역류하면서 주변의 흐름과 분리되면 당연히 통증이 발생한다. 


통증이라는 것은 

바로 이러한 전체적인 몸에서 분리된 부분에서 일어나는 비명소리라고 할 수 있다.


전체성으로부터 벗어난 분별된 의식은 언제나 비명을 지르고 있다. 



가장 근원적인 고통은 분별 자체이다.


그러한 분별심을 일으키는 행위를 누군가에게 가한다면,

그것은 당연히 서로에게 근원적인 고통을 일으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얀 화지 위에 그려진 형상을 선명하게 만드는 일체의 행위는 

합일, 동일성, 무분별 등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것이다.


누군가를 괴롭히는 일체의 행위는 분별심을 강화한다.  


'나는 너와 다르잖아' 또는 '인간은 어쩔 수 없이 다른거야'라고 한다면,

그것은 바탕을 보지 못하고, 그 위에 그려진 형상에 집착하는 것이리!


서로 다름으로 인해 힘든 시간을 보낸 뒤에 대부분

그 다름 자체를 인정하는 방향으로 마음이 넓어진다.


물론 서로 다름을 인정하는 마음은 큰 마음일테지만,   

아무리 바탕 위의 다른 형상들을 넓은 마음으로 인정한다고 한들, 

궁극적인 본연의 전체성에 대한 갈증은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 마음 본연의 바탕 위에 그려진 수 많은 형상들이 사라지면 

본래 그것이 드러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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