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5-11-01 18:09
성취해야 할 무언가가 있다는 것에 대하여 I
 글쓴이 : 수돌
조회 : 1,333  


수행은 어떤 특정한 목적, 

즉 깨달음 또는 해탈, 열반, 독존 등을 성취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처럼 성취하려는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은 아직 그것이 성취되지 않았다는 것이기도 하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 용맹정진해야 할 것이고, 
언젠가는 성취할 그 순간이 올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한시도 마음을 놓지 말고 그것을 위해서 정진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 - - 

그런데 - - - - - 

과연, 무엇을 성취해야 하는 걸까요? 

이미 성취했다면 성취할 것이 없을 것이고,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으니, 성취하기 위해서 노력할 것도 없겠지요! 

너무 당연한 말이라구요! 

그런데 성취하고자 하는 것이 뭔지 알고 계시나요? 그리고 
그 궁극적으로 성취할 것이 자신에 의해서 성취될 수 있음을 어떻게 확증하셨는지요? 

'궁극적인 성취를 위해 노력하는 수행'은 
'궁극적인 것은 성취된다'는 것이 입증될 때 타당한 것입니다. 
성취되지 않는 데도 얻으려고 노력하는 수행은 무의미하기 때문이죠! 
  
즉 '궁극적인 성취를 위해 노력하는 수행'은 
'성취되어야 할 궁극적인 그것'이 '나에 의해서 성취될 수 있다'고 확증될 수 있을 때 타당한 것으로서 인정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궁극적인 그것'이 이전에 성취되었던 경험이 없다면, 
'나에 의해서 그것이 성취될 수 있다'는 확증은 어떻게 가능한 걸까요? 

이전에 누군가(성인) 그것을 성취했다는 사실을 
나에게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고 추정할 수도 있을텐데, 과연 그것이 타당할까요? 
'그의 성취'가 '나의 성취'를 어떻게 보장해줄 수 있을까요? 
‘성취했던 그’와 ‘성취해야 하는 나’ 사이의 동질성이 어떻게 확증될 수 있는 걸까요? 

예를 들면, 붇다의 깨달음이 어떻게 나의 깨달음을 확증해줄 수 있을까요? 

'미래에 언젠가 나는 성취할 것이다'라고 추정한다면, 여기서 '성취하는 나'는 '미래의 나'인재의 나'는 어떻게 '미래의 나'를 예측할 수 있을까요?  

물론 자전거 타는 친구를 보고 따라서 타다보면 자전거를 잘 타게 되지요!

그런데 외적인 동작은 볼 수 있기  때문에 따라하는 것이 쉽죠! 

깨달음 내지 신비체험과 같은 내적인 상태를 따라 한다는 것이 가능할까요? 



수행을 비유할 때, 다음과 같은 흔한 주장이 있습니다. 

"구름에 항상 가려져 있어서 나는 그 산 꼭대기를 본적이 없지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것을 향하여 가려고 한다는 말은 오류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궁극적인 것을 향하여 용맹정진하여 그 경지에 도달하는 것 또한 산 꼭대기에 오르는 것처럼 가능하다."라고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간과되고 있는 점은 
우리가 수행을 통해서 '성취되어야 할 것', '도달되어야 할 목적'이 외적인 대상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수행을 통한 성취'는 외적인 물건을 얻는 것이 아니라 '어떤 내적인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수행을 통해서 성취될 것을 외적 대상처럼 대상화하고 있다고 할 수 있죠! 
이것은 내적인 주체를 외적 대상으로 착각하는 오류입니다.

결국, 수행에서 성취의 문제는 모두 수행자 자신의 내면으로 되돌아 올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요가수뜨라에서 "요가는 심작용의 지멸이다"라고 정의하였는데, 이러한 맥락이겠지요. 

이제 우리가 성취하려는 그 상태가 우리 내면에 대한 것이라는 점이 제시되었습니다. 


그런데 "내적인 상태의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서 수행한다"고 말한다면, 
이미 그것이 무엇인지 '내면에서 이미 알고 있다'고 말하는 것과 동일하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서 안다는 것은 이미 그 궁극적인 상태에 도달한 것이 됩니다. 

 ‘--을 안다’는 말에 대해 살펴보죠! 
  
‘나는 서울을 안다’라는 말은 일상적인 대화에서 무리가 없어 보입니다. 
우리는 ‘--을 안다’는 말을 그 내용에 있어서 전체적인 면모가 고려되지 않은 채로 관용적으로 사용하는데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러나 서울에 대해서 뭘 안다는 걸까요? '서울'이라는 말을 안다는 것인지, 서울의 위치인지, 서울의 분위기인지, 서울의 경제적인 상황인지, 서울에 가 본적이 있다는 말인지, 설령 가봤다고 해서 그 전체를 안다고 할 수는 없겠죠? 

그리고 그 상태에 도달한 적이 있기 때문에, 그것에 도달하려한다면, 
그것은 기억의 대상이었던 것이기 때문에 이 또한 궁극적인 상태라고 할 수 없습니다. 

기억이란 '기억하는 자'와 '기억의 대상'을 전제로 하여 성립됩니다.  
'그 상태에 도달한 적이 있기 때문에 그것에 도달하려한다'고 말할 때, 
'그 상태'는 기억의 대상이 되어버리기 때문에 이 또한 궁극적인 내적 상태라고 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성취되었던 적이 없다면, 
'성취될 것(목적)'과 ‘내가 그것을 성취할 수 있음’을 확증할 수 없습니다. 
이때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 노력하는 수행'은 
목적지를 모르고 목적지를 향하여 가는 것처럼 잘못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나는 지금 그것을 성취하지 못했기 때문에, 아직 그것을 모르지만, 일단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 노력한다"라는 생각으로 수행하는 것은 자체로 '선결문제 미해결의 오류'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취될 것'과 ‘내가 성취할 수 있음’을 확증한 다음에 수행을 하면 되잖아요"라고 생각한다면, 
거듭 동일한 오류에 빠지게 됩니다. 


반대로 그 상태에 도달된 적이 없다면, 
당연히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그것을 지시할 수 없고, 
알지 못하는 그것에 도달하려는 노력은 목적지 없는 전진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그 상태'는 어떻게 이해해야 될까요? 
이러한 질문 또한 오류입니다. 
'나 자신이 체험하고 있는 그 상태'에서 동시에 그 상태를 '내가 이해할 대상으로 삼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죠! 
그 상태'가 과연 이해의 대상이 될 수 있을까요? 
이해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확증이 있을 때 이해하려고 노력할텐데 말이죠! 

‘그 상태’는 결국 ‘그것이 아닌 것이 아닌 것’, 
즉 "neti, neti"(…이 아니고, …이 아니다)라고 밖에 할 수 없는 것이 될 것입니다. 

"neti, neti"는 "…이고, …이다"에 대한 반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궁극적인 것은 ---한 것이다”라고 판단하는 입장은 언제나 궁극적인 것에서 멀어진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neti, neti"는 일체의 지시될 수 있는 대상성과 유한성, 상대성을 벗어나는 것으로 설명되기 때문에, 
지칭할 수 없는 것입니다. 

결국 "neti, neti"는 '그것을 성취한다'는 생각 자체가 자연히 오류임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성취될 것'과 ‘내가 성취할 수 있음’을 확증할 수도 없고, 
"neti, neti"처럼 어떤 언어적인 설명도 불가능한 '그것'을 생각조차 할 수 없는데, 
어떻게 성취할 수 있을까요? 


어떤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경우, 
대부분 질문 자체의 오류로 인해서 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성취하거나 도달한다는 생각 그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요? 

모든 목적 지향적인 행위(karma)는 의도(karma)를 기반으로 일어납니다. 
그런데 수행을 통한 성취는 역설적이게도 
그러한 일체의 의도를 거두어들이는 방식으로 전개됩니다. 

왜 의도를 가지면 안되는 걸까요? 
"아무것도 행위하지 않고 살 수 없잖아요"라고 반문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의도 없는 행위는 어떻게 일어나는 걸까요? 

가려우면 긁고 싶고, 배고프면 먹고싶고, 햇빛이 눈부시면 눈을 감게됩니다. 
'완전히' 의도가 없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의도 없는 자연스런 행동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요? 

깨닫기 위해 노력하려는 의도는 예외적으로 인정되어야 하는 걸까요? 
깨닫기 위해 노력하려는 의도로 수행하면 일체의 의도 없는 상태에 이를 수 있는 걸까요? 

의도는 '의도하는 자'를 전제로 일어납니다. 의도적으로 '의도하는 자'를 사라지게 할 수 있을까요? 
의도적으로 '의도하는 자'를 사라지게 하려는 자는 바로 '나'입니다. 

마하르쉬 또한 이러한 착각을 “마치 도둑이 경찰관을 가장한 채 도둑을 잡으려 하는 것과 같다.”고 비유하기도 했습니다. 
  
가려우면 나도 모르게 긁게 됩니다. 
의도 없는 행위는 나도 모르게 긁게 되는 그런 것이 아닐까요? 
어쩌면 수행이란 가려우면 자연히 긁는 것처럼, 

나를 괴롭게 하는 것(고苦)에 대한 자연스런 반응에서 출발하는 게 아닐까요? 
어쩌면 고통에 대해서 그것을 해소하려는 자연스런 행위가 수행이 아닐까요? 

고통스러우면 자연히 피하게 됩니다. 
고통 자체를 알아차리는 순간 그 고통에 대한 해소를 구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고통을 여실하게 보는(觀) 순간 고통은 해소되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고통에 대해서 그것을 해소하려는 자연스런 행위가 자연스럽게 일어나도록 할 수 있나요? 

고통에 대한 자각, 즉 '스스로 알아차림'이 무엇보다 중요할 수 있겠네요.

가려운 곳을 알아차릴 때 자연히 긁듯이 
고통이 일어나는 곳을 알게 될 때, 자연스럽게 그 고통을 일으키는 행위를 하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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